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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주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아서 기도지요? 

제가 아무리 소원을 빌어보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진짜 이뤄주시면 곤란합니다. 

제 눈앞에서 방실방실 웃고 있는, 고운 한복을 입은 이 작은 여자아이는 대체 누구인가요.

제 하나뿐인 애인의 어린 시절 사진과 믿을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는데, 설마 아니겠지요. 

바라건대 이게 무슨 일인지 좀 알려주시고 어린양을 고난에서 구하소서. 

제발, 아멘.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낱낱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젯밤 자기 전, 저는 저녁 후식으로 먹은 찹쌀떡마냥 볼이 주욱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냐고요. 자기 전에 침대에 함께 누워 제 볼을 잡아당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제 애인인 후우 한 명 뿐이지요. 묘하게 부루퉁해진 표정으로, 입은 꾸욱 다물고 있는 걸 보면 분명 토라진 것이고, 저는 이럴 때면 항상 그렇듯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빠르게 되감기하며 제 죄를 고해할 준비를 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후우의 가족으로부터 식사 초대 연락을 받았습니다. 새해 전날에 가족이 모이는 시간을 만들고 싶으셨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외국에 살고 함께 새해를 맞을 가족이 없는 저를 배려해 주신 것이겠지요. 따뜻하고 정갈한 저녁 식사를 감사히 마친 후에, 차를 마시며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이나 내년의 소원 등을 주제로 담소를 나눴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은 아직 조금 어려운 분들이지만, 워낙 저를 좋게 봐 주시기도 하고, 후우의 남동생인 카이와도 조금씩 어색함이 덜어지고 있고… 그런 자리였던 만큼, 분위기는 훈훈했던 것 같습니다. 후우도 친가에 왔으니 평소보다도 편하게 웃는 표정 일색이었구요. 

그러다가 문득 가족 사진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습니다. 저는 가족 사진이라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추억 보따리를 풀어놓는 모습을 묵묵히 보고만 있었는데요… 어머님께서 갑자기, 벽장에서 오래된 앨범 하나를 꺼내 오시더군요. 아, 이 때 후우와 카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난처해졌던 것 같기도 해요.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저 보라며 펼쳐주신 앨범에는 니지마루 남매의 아주 어린 시절을 찍은 사진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거든요. 둘의 시치고산이라던가, 유치원 입학식이라던가, 여름방학에 시골에 놀러간 사진이라던가… 웃는 모습, 우는 모습 할 거 없이, 이것만 봐도 둘이 어떻게 자랐는지 거의 다 가늠할 수 있을 만큼이었어요. 

아무래도 애인(그리고 예비 매형)에게 어렸을 적 사진을 무방비하게 보여주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겠죠. 카이는 그래도 나참, 하면서 머리를 벅벅 긁는 정도로 끝났는데요, 후우가 얼굴이 그렇게 빨갛게 익은 걸 보는 건 정말 드물어요. 이건 보면 안 돼-! 하면서 사진 몇 개를 열심히 가리려고 해 봤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이미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게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이 정도였으면 후우가 그렇게 토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이 다음 시점에서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어때, 한 장 가져갈래? 하시는 걸 예의상(그리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인 스물세 살의 후우를 생각해서라도) 거절하는 게 맞았는데, 저는 처음 보는 애인의 어린 시절에 너무나도 즐거웠던 나머지 사양도 하지 않고 한 장을 골라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그것도 후우가 아주 적극적으로 가리려고 노력하던 한 장을. 

그게 뭐였냐고 하면, 처음으로 젖니를(그것도 앞니!) 빼고 와앙- 울고 있는 여섯 살인가 일곱 살 즈음의 후우를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밀가루 반죽마냥 신나게 늘어난 제 볼이었다는 건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죠. 

"이아, 으어어이으어어(미안, 그치만 귀여워서.)"

"이빨도 없이 우는 게 그렇게 귀여워?"

"아(응…)"

"그럼 새해 소원으로 내가 어려지는 거라도 빌어, 흥."

"아으어엉(그건 아니고…)"

평소에 화내는 일 한 번 없이 조용하고 상냥한 후우가 이렇게 입술이 댓발 나온 건 거의 처음 보는 일이어서, 실은 이 모습도 말도 안 되게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말하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볼이 추욱 늘어져 안 돌아가기 전에 사진을 반환하겠다며 싹싹 빌어야 했구요… 그 후에도 한동안 빨갛고 부루퉁하던 귀여운 후우는 화내느라 지쳤는지, 올해는 꼭 해가 넘어갈 때 깨어있겠단 약속도 잊어버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저도, 사진 속 어린 후우를 꿈에서라도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같은 생각을 하다가 따라 잠들었어요. 

여기까지, 어제 있었던 일.

…보통 우리는 이런 일을 기적이라고 하죠. 상식적으로 일어날 리가 없어서 처음엔 꿈인가 싶은 일을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평소보다도 묘하게 품 속의 후우가 작고 따끈따끈하더랍니다. 평소에도 불면 날아갈 것처럼 자그마한 사람은 맞는데, 그, 자주 안다 보면 알게 되는 그 크기의 감이 있잖아요. 그거에 안 맞았어요. 그리고 묘하게, 감촉이 이상했어요. 이상한 소리 같지만 옷의 감촉입니다. 익숙한 면 잠옷이 아니라 뭔가 사각사각하고 매끄러운 게 은근히 불편해서 눈을 반짝 떠 봤어요. 

익숙한 옷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볼 일은 없는 옷이에요. 후우에게 한 번쯤은 입혀보고 싶긴 했지만, 적어도 오늘 계획해두진 않았어요. 조그마하지만 광택이 고급스럽고 마감이 깔끔해서, 대충 장난으로 입히는 값싼 옷이 아니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는 치마저고리. 

...아니, 그런데 진짜, 왜 이렇게 작죠?

제가 침대에서 튕겨나가는 것도 모르고 새액, 새액 하며 세상 달게 자는 어린아이. 흐르는 바람을 묶어놓은 듯한 맑고 푸른 하늘색에, 앞머리 끝부분이 하얗게 새어있는 머리카락. 아마 눈을 뜨면, 

우으응.

네, 저렇게,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까지. 전부 후우와 같은 색이잖아요. 

"... ... ..."

"... ... ..."

"...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あけまして、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

그리고, 특유의 느릿한 말투, 약간 새는 듯한 발음으로 새해 인사를 하고서,

해맑게 웃는 아이에게는 어제 본 사진과 똑같이 앞니가 없고.

저는 그만 눈앞이 깜깜해지고 말았습니다. 

... 

깨어나서 줄곧 저만 보며 방실방실 웃는 아이에게 이름과 나이부터 물어봤습니다. 

"후우 일곱 살이에요~"

심장에 좋지 않아요. 이게 중요한데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후로도 이 꽉 물고 몇 가지 확인 작업을 거쳐봤는데, 어제 사진으로 본 후우의 어린 시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이야기를 하니 저는 의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머님이 이야기하시던 '순하고 잘 웃고 낮선 사람도 좋아하는 아이' 라는 묘사와도 정확히 일치하잖아요. 저를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동주!" 하고 가르쳐 준 이름을 불러보고는, 어감이 우스운지 혼자서 까르르 웃고 있는 일곱 살 후우. 사족이지만, 이 시점에서는 한국어를 알 리가 없으니 대답은 전부 발음이 살짝 새는 일본어로 돌아옵니다. 미치겠네! 

"동주~ 배고파요."

압도적인 귀여움에 취해 있던 저는 그래도 그 말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애인을 배고프게 하는 건 (몇 살이 되었든) 안 될 일이죠. 오세치를 만들 손재주까지는 없었던 저는, 미리 구해둔 떡을 가져다가 금방 떡국을 끓였습니다. 후우가 딱히 일본식 전통을 고집하는 일도 없으니 문제는 없구요. 아이가 먹을 테니 간은 약하게. (이 시점에서는) 처음 보는 음식에 깜찍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후우에게, 떡을 잘 식혀서 내밀어보면 오물오물 잘도 먹습니다. 

"맛있다!" 

이 모든 문제를 그저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리는 일곱 살의 반짝이는 미소. 저는 순간 후우가 어떻게든 스물세 살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그저 웃고 말았습니다. 손에는 조금 큰 숟가락을 혼자서도 잘 잡고 야무지게 떡국을 해치우는 당찬 모습… 아니야!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 간악한 술수를 꾸민 누군가는 제가 그저 이 상황에 만족하고 타협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예요. 후우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족들은 어쩌고 저는 어떻게 하나요. 우리 올해는 결혼하기로 했는데, 일곱 살배기 신부를 결혼식장에 세울 순 없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야고보서 4:7) 

하지만 후우는 제 이런 다짐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주! 새해엔 하츠모데예요! 오미쿠지도 뽑으러 가요!" 

하면서 언제 준비해둔 건지 모를 귀여운 버선까지 꿰어 신고는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펄쩍펄쩍 뛰고 있어요. 아니, 한복 입은 아이가 일본 신사에 하츠모데를 가는 게 과연 괜찮을까요? 나가는 건 그렇다 치고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이 시련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하기엔,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제게 무언의 땡깡을 부리고 있는 후우가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절대 다 포기하고 즐기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귀여운 어린 후우에게 새해 첫 날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일은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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