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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신 머리카락은 꼭 깃털 같아요. 이렇게 이렇게 쓰다듬으면 얼마나 보드랍고 폭신한지요. 잠결에 뻗은 손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이토록 서운해지는 걸 보면,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당신의 감촉에 중독되었나 봅니다.

 

눈을 뜨면 아홉 시. 일렁거리는 커튼 사이로 쨍한 햇살을 머금은 여름 바람이 훅 끼쳐 들어옵니다. 미묘하게 달콤한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뜨면, 오늘도 아침 기도 시간을 넘어서 늦잠을 잤다는 걸 깨달아야 하지요. 이젠 놀랍지도 않은 일상이기에 미적미적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습니다. 기도 시간에 늦으면 천벌이 내릴 것처럼 떨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좀 그럴 수도 있지 않냐고, 늦잠이 생활인 귀여운 애인을 만나게 해 주셔놓고 제 시간에 일어나라고 하는 것도 경우가 아니라고 기도문에 앞서 꿍얼거릴 정도로는 타락을 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요. 

 

아멘, 하고 일어서자마자 고민을 좀 해야 합니다.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일러서요. 이런 날에는 깨우지 않으면 오후에나 일어나는 당신이잖아요. 전화기를 들고 걸까, 말까, 거실을 빙글빙글 돌다가, 모르겠다,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거의 끊기기 직전이 되어서야 잠에 한가득 취한 몽실몽실한 목소리가 들려와요.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순간입니다.

 

대뜸 귀여워, 하면 응, 귀여워. 하고 아무 말이 돌아와요. 나 좋아? 하면 좋아, 하고도 돌아와요. 비몽사몽한 당신은 늘 이렇죠. 나중에 부끄러워서 샐쭉해지고 말지만 이 못된 버릇을 고치기엔 너무 늦었어요. 역시, 덕분에요. 

 

그러다가 오늘 뭐 할까? 하고 물어보자, 당신은 음… 하고 한참 말꼬리를 늘려요. 다시 잠이 들었나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조그맣게 소풍, 하는 말이 들려옵니다. 날씨도 좋으니까… 소풍, 가자, 하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휴일 아침의 느긋하던 몸과 마음에 활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소풍을 가려면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그런가, 그것도 있지만, 조금만 있으면 며칠 전에 새로 샀다는 하늘하늘한 여름 원피스를 입은 당신을 볼 수 있다는 게 설레고 설레서. 오늘의 당신은 어떤 천사의 현현 顯現 과도 같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힘이 솟지요. 찬장에서 꺼내 온 도시락 찬합 안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것만 같달까요.

 

여기서 살면서 들은 말 중에 인상 깊은 말이 뭐냐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을 사로잡으려면 그 사람의 위장을 사로잡아라’ 일까요? 맛있는 밥을 해주는 사람에게는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인지. 하지만 나는 반대로, 정성들여 만든 밥을 항상 행복하게 먹어주는 당신을 볼 때마다 그 모습에 대책없이 빠져들고 맙니다. 이렇게 행복한 주객전도가 또 있는 걸까, 생각하면서. 

 

그러니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모습을 보기 위해 솜씨를 발휘해야겠어요. 유월이라지만 한낮이 되면 제법 무더우니, 따뜻한 밥 같은 걸 가져가면 먹기에 조금 고역일지도 모르고…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해볼까요. 토마토와 루꼴라, 모짜렐라 치즈를 넣은 작은 샌드위치, 시소잎을 갈아 만든 페스토에 버무린 냉파스타… 입가심을 할 과일로는 요즘 한창 단맛이 올라오는 복숭아와 체리, 그리고 맞아, 얼린 바나나도. 

 

둘만의 소풍이면 좋기도 하겠지만, 이런 날엔 당신도 좋아하는 친구를 같이 데려가지 않으면 아까워요. 방 한 켠에는 푹신한 쿠션을 깔아놓은 라탄 바구니가 있고, 그 안에는 나의 오랜 친구가 미동도 없이 자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널브러진 봉제 인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초록색 원숭이는 디지몬이라는 신기한 생물. 신의 뜻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해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바나나라면 그저 좋아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은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요. 작게 썰어 냉동실에 얼려둔 바나나를 꺼내서, 허공에 던져 주면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원숭이다운 몸놀림으로 기세 좋게 뛰어올라 낚아챕니다. 와작와작 씹어먹는 무표정한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릅니다. 작은 행복에도 이토록 행복해하는 삶의 태도는, 갈수록 더 큰 행복을 찾아 목말라하는 요즘의 나 자신에게도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만의 잘못인가 하면 좀 억울한 면이 있다고 해도요.)

 

바나나를 다 먹으면 다시 바구니로 걸어들어가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끝없는 묵상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친구의 오랜 버릇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도시락 준비를 하려던 나에게 말을 걸어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동주.

 

…응?

 

지금, 행복해?

 

짧지만 심오한 울림으로 친구의 물음이 내 안에 퍼져나갑니다. 나는 그 말에 주방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활짝 열었어요. 아침 열 시. 제법 쨍하지만 아직 보드라움을 잃지 않은 여름 햇살이 축복처럼, 계시처럼, 온몸으로 내려앉습니다. 

 

춥다, 라고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게 언제이지요? 섬기는 길이라는 건, 이토록 끝없는 추위 속에 자신을 내려놓는 삶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되새겼던 게 언제이지요? 이젠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나의 봄, 나만의 봄바람이 내 심장에 낀 가장 깊은 서리마저 녹여낸 지 올해로 이 년,

 

이제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이토록 찬란한 여름 속으로 걸어들어갈 테지요. 

 

…행복해! 

 

진심을 가득 담아 대답하자, 나의 초록색 친구는 지금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유쾌한 미소를 보여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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