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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로사와 쿄코는 오늘도 변함없는 금빛 눈을 빤히 뜨고 서 있었다. 교복보다 편안하고 교복과는 달리 새삼스런 귀여움이 뒤섞인 모습으로. 멀리서부터 작게나마 그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바르게 선 폼은 한결같고, 이따금 이 사람이 누굴 기다리는지 호기심을 갖듯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가볍게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아는지 모르는지 가벼이 시계를 바라보는 쿠로사와의 고갯짓이 까딱,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늘 그렇듯 초조함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그런 뒷모습이 보였다.

 아키모토 코우키는 빠른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쿠로사와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었다. 학교 바깥이라며 습관적으로 장식을 늘렸지만, 딴에는 얌전한 모습으로. 아침부터 잠시 별 의미 없는 고민을 하며 옷장 앞에 멈춰 서 있던 결과였다. 애매하게 단정한, 그렇다고 정말 얌전해 보이기는 실패한 양아치. 어차피 코우키에게 얌전한 옷이라고 해봤자 무늬가 없을 뿐이다. 설령 다른 옷이 있었다고 해도 피어싱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혹은 그렇게까지 하는 건 이상했다. 쿠로사와가 생각하는 오늘 약속은 그런 의미도 아닐 테고, 코우키 생각에도 그랬다. 그렇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적정선을 코우키 홀로 잠시 신경 썼다.

 걸어가는 동안 코우키는 하필 광장 시계탑 아래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후회했다.

 광장은 둥글게 넓었고, 몇 걸음마다 대화 소리가 들릴 만큼 사람이 많았다. 중앙시계의 달린 둥글고 투박한 장식이 홀로 높게 번뜩였다. 그 아래에 쿠로사와가 있었다. 그리고 카페 홍보를 한다며 전단지를 돌리는 곰인형탈과, 공짜로 받은 풍선을 흔들고 다니다 코우키의 뒤통수에 몇번 부딪쳐댄 꼬마들과, 코우키나 쿄코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동급생 이와이와, 똑같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자기야, 왜 이제 와? 보고 싶어서 찾아갈 뻔했잖아~"

 "미팅 시작도 안 했는데 30분 지각이야. 뭐하는 인간이래?"

 "응, 사와카. 나 지금 도착했어. 아, 아냐. 더 늦어도 괜찮아! 얼마든지 기다릴게!"

 하여튼 쿠로사와가 거기 있었다.

 나카미치 광장의 연인들 틈에.

 

 

 

 두 사람은 하필 닮은 옷을 입었다.

 한여름의 소란 속에서도 쿄코의 실루엣은 그럭저럭 코우키의 눈에 들어왔다. 눈이 좋기 때문인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쿠로사와를 찾는 일은 언제나 쉬웠다. 코우키는 쿄코를 한번 멀리서 눈에 담고는 멍하니 '꾸몄다' 고 생각했다. 몇 발자국 더 걷다 뒤늦게 옷이 닮았다는 걸 눈치챘다. 어쩌면 일부러 맞춰 입은 사람들처럼,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이 같은 로고에 같은 소재의 옷을 나눠 입듯이.

 ‘앗짱, 어때? 이번 머리는 엄청나게 귀엽지 않아?’

 문화제 준비에 열을 올리던 반 애들 틈에 쿄코가 앉아있던 것을 기억한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엉뚱한 곳에 집중하던 다섯쌍의 눈길이 코우키에게 꽂혔다.

 쿄코를 둘러싸고, 코우키가 직접 귀엽다고 해주기 전까진 안 보낼 것처럼. 이제 와 어떤 머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다른 사람들이 머리를 만져줘도 가만히 있는 쿠로사와를 신경 썼었다. 쿠로사와는 예전에 코우키가 머리를 묶어줘도 가만히 있었으니까. 쿠로사와에겐 어떤 일은 괜찮고 어떤 일은 또 안 괜찮은 걸까, 하고 미묘한 기분으로 짐을 든 채 복도를 걸어갔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가끔씩 그런 쿄코의 아무렇지 않은 면면들이 코우키에겐 순간의 난제였다. 금세 잊어버려 놓고 훗날에 떠올릴 것들, 결국엔 잊혀질 것들에 어리석은 고민만 갖게 했다.

 나한테 묻지 말라며 지나치길 몇 번. 코우키는 제 기준으로 쿄코에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머리를 골라줬었다.

 ‘뭐였더라.’

 가까이 갔을 때쯤엔 신경 쓰지 말자며 생각을 접었다. 쿠로사와가 집안사람들의 손에 꾸며진 것이나, 서로의 옷이 닮은 우연이나,     두 사람이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연인들과는 관계없다.

 "쿠로사와, 너 엄청 일찍 나왔네."

 "엄청까진 아니에요. 아키모토군도 빨리 왔네요."

 "난 코앞이니까."

 "저도 가까워요.“

 코앞까진 아니다. 심드렁히 말하고 보니 반쯤 호기로운 과장이었다. 코우키네 집에서부터 코앞은 아니고, 쿠로사와네 집에서 여기까지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건 아니지. 코우키는 머릿속으로 변명했다. 시선이 자연히 허공으로 돌았다.

 심심한 말들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주변은 여전히 여름이었고, 이따금 풍선이 공중을 흘러 다녔다. 멀찍이 동급생 이와이가 풍선을 받아 들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곁에 선 사람이 오늘 데이트 상대라도 되는지 이와이의 표정이 볼만했다. 물론 코우키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었다.

 ”쿠로사와.“

 ”네.“

 ”같은 반 녀석 있으면 인사할 거지.“

 ”아무래도, 하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와이랑 인사하기 싫었다. 그야 같은 반 아이들은 이제 와선 겁이란 걸 상실했는지, 코우키가 무해하다고 생각했는지 앗짱, 앗짱 하며 달려들뿐더러…

 ”아키모토군은 인사하기 싫은가요? 그럼…“

 데이트라고 생각할 것 같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아떨어졌다. 코우키는 머릿속으로 솔직하게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해야 쿠로사와가 쉽게 지나쳐 줄 거라고 생각했고, 쿄코는 또 아키모토가 자기멋대로 생각하고 있거나 뭔가 열심히 고민하고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쿄코는 생각보다 단순명확했고, 코우키는 쿄코를 상대하면 할수록 엉뚱한 생각만 점점 더 길어졌다. 복장 단속은 우습다고 하면서도 이런 일에는 내면까지 단속이라도 당할 듯이 도망쳤다.

 ”…밖에서 아는 애 만나면 좀 부끄럽잖아.“

 결국 바보같은 소리만 하면서.

 

 

◀◀

 

 서로를 친구라 부를 만한 둘이 영화관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지난 1년새에 쿠로사와는 딱 쿠로사와의 몫만큼 아키모토를 알아냈다. 아키모토는 멋쩍거나 불만이 있으면 한번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가 되돌린다. 거짓말은 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습관적으로 이따금 뒷머리나 목 뒤쪽을 매만진다. 위악적으로 굴고 싶어 하지만 어린애 같을 때도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때론 이해할 수 있다. 친구가 되어가는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아키모토도 딱 아키모토의 몫만큼 쿠로사와를 안다. 쿠로사와는 특이하다. 그저 코우키 본인이 쿄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코우키는 엉뚱하게도 제법 아는 것이 많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희미하게 안다. 쿠로사와는 보기보단 거짓말을 잘하고, 다만 의미없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고. 다정하지만, 한없이 다정한지는 모르겠다. 그런 애매한 다정함이 싫지 않다.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이해한다. 때론 이해하고 싶었다.

 이 여름이 한바퀴 되돌아오는 동안 코우키는 그런 쿠로사와에게 쉽게도 이끌려 다녔다. 누군가 다정이라고 하면 그런 것이고, 우정이라고 하면 그런 것에. 알 수 없는 관계지만 이제 와선 영영 싫어할 수도 없다. 코우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같이 영화를 볼 줄은 몰랐던 것도 같고, 알았던 것도 같고.

 광고가 끝나며 천장의 조명이 꺼졌다. 화면의 빛을 받으며 코우키는 비스듬히 앉았던 몸을 바로했다. 흐릿한 빛 속에 쿠로사와의 옆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뒤늦게 문화제날 자신이 골라주었던 머리를 기억해냈다.

 땋은 머리.

 코우키는 쓸데없는 생각이 많다.

 영화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

 

 ”거기 두분! 커플이면 10% 할인해드려요~!“

 ”아닙니다.“

 ‘망할 곰.’

 누가 커플이야? 그 와중에 풍선을 낚아채는 것으로 코우키가 성질을 드러냈다.

 ”화풀이하지 마세요.“

 ”화풀이 아냐. 아니라고 표현하는 거지.“

 ”아키모토군은 아니었는지 몰라도, 그것도 화풀이예요.“

 옆에서 곧장 잔소리가 들어왔다. 코우키가 서러워지려는 찰나 옆에서 또 곰이 끼어들었다.

 ”커플 아니어도 두 사람이면 브런치가 10%~!“

 ‘곰탈 자식.’

 곰탈의 알바생은 풀도 안 죽고 쿄코에게도 살갑게 굴며 풍선을 건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 다 풍선을 하나씩 들었다. 노란색에 빨간색. 짜증난다고 뺏은 걸 버리지도 못하고 팔목에 묶고 다녀야 했다. 지나가는 길목마다 짐이 서서히 늘어났다. 웃으며 풍선을 쥐고 있던 이와이를 이젠 우습다고 할 수 없다. 아이스크림도 지나치다 쳐다보았더니 쿄코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내가 애냐고 했어야 하는데, 잠시 망각하고 이것도 하나씩 들었다. 안타깝게도 코우키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두세입에 대충 먹어 치우며 제법 맛있다고 생각했다. 곁에서 더 많이 사줄 걸 그랬나 생각해본 쿄코는 차치하고.

 그 외에도 하필 열려있던 플리마켓이나, 근래 들어섰다는 대형 베이커리나. 지나치며 보이는 곳곳들을 아무 이유 없이 들어갔다. 늘 그렇듯 쿠로사와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다가도, 코우키는 자신이 가고 싶어 했었는지도 모를, 퍽 알만한 곳에 나란히 서 있었다. 결국 옆사람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게 편했으니 대부분은 따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쿠로사와의 옆얼굴을 보는, 이 순간에만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머지는 여전히 때때로 낯설다.

 서로 심심한 청춘을 마무리하지 않게 두자면서, 그렇게 남은 청춘의 대부분은 어차피 쿠로사와였다. 가끔 땋은 머리, 평소엔 길게 풀어내린 머리, 그날 이후 변함없이 금빛인 눈. 누군가 골라주었을 옷. 언젠가부터 익숙한 시선. 코우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에만 흘러나오는 웃음. 아키모토 자신의 모습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알 수 없고, 오로지 쿠로사와만 기억에 남았다. 스스로 잘해나갈 인간이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코우키에게 안겨준 청춘이다. 이제와서 바란 적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갚을 도리도 없다.

 이런 건 전부 추억으로 남는 건가?

 인형뽑기 앞에 서서 할 번뇌는 아니다.

 ”아키모토군은…토끼를 정말 좋아하네요.“

 무의식중에 인형을 열심히도 뽑았다. 노리던 것은 토끼. 코우키는 뽑은 인형을 잠시 머쓱하게 쥐고 있다가 늘 그러듯 쿄코의 손에 얹어두었다. 신세진 것을 갚느니 하며 준다는 것이 매번 인형이다.

 ”어딜 가도 있으니까. 좋아하는 건 아니고.“

 ”곰이나 강아지도 많은데 아키모토군은 늘 토끼를 고르니까요.“

 ”아니…쿠로사와, 토끼 좋아하잖아.“

 어쩌다 그렇게 됐어? 하는 눈길로 지긋이 바라본 쿄코는 까만 토끼 인형을 기계 옆에 착 얹어두었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잊지 않고 했다. 둘의 키에 비해 작달막한 뽑기 기계였다. 물러나서 보면 될 것을 나란히 숙이고 섰다. 옹기종기 서 있으니 정수리만 부딪칠 뻔했다. 도리어 인형도 잘 안 보였다. 나름 집착적으로 남의 인형뽑기를 보던 코우키는 결국 뒤로 물러났다.

 ”이건 아키모토군 거.“

 머쓱하게 내민 손에 강아지 인형이 얹어졌다.

 ”왜 하필 개야?“

 ”강아지예요.“

 ”왜 강아지야?“

 ”보답하려고 보니, 강아지가 많이 보였네요.“

 그렇겠냐? 하고 코우키가 쿄코를 바라보았다. 그러건 말건 쿄코는 강아지를 하나 더 뽑아서 챙겼다.

 짐이 또 늘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지나치며 산 문고본, 샘플처럼 사본 빵, 강아지 인형 둘에 토끼 인형 하나, 풍선 둘을 끼고 끝내주는 하루를 보낸 것처럼 걸어 다녔다. 그리 크지도 않던 풍선은 잠깐 새에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르러 자꾸만 가라앉았다. 광장으로부터 멀리, 기나긴 상업지구의 끝 즈음에 다다라 두 사람은 팔목에 감고 있던 끈을 천천히 풀어냈다.

 왜 이걸 여태 하고 다녔을까. 코우키는 굳이 끊어내지 않고서 시간을 들여 실을 풀어냈다. 의문하면서도 이 모든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코우키는 이런 이유없는 일들의 의미를 모른다면서도 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노을에 비친 풍선의 노란색이 본래 그런 적 없다는 듯이 붉었다. 풍선이 가드레일에 통통 부딪치는 소리가 묘하게 처량했다. 그러나 처량할 것도 없고 대단할 것도 없는 날이다.

 

   ”쿠로사와.“

 아키모토는, 코우키는 자신을 돌아보는 쿠로사와를 마주하며 새삼스레 신기해했다. 사람들 틈에서 돌아볼 때도, 아이들이 요란을 떨 때도, 자신이 이렇게 부를 때도 비슷하다며, 쿠로사와는 누군가의 꿈에 나오기도 쉬울 거라고. 아이들 틈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쿠로사와도 정확히 이랬으리라. 상상해보았다. 언제 어디서든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쿠로사와를 떠올리면 좋았다.

 ”선물.“

 어느 가게 앞에서 뻔하게 산 팔찌는 그렇게 쿠로사와의 팔목에 걸렸다.

 ”…인형 줬으니까.“

 낯익은 설명이 뒤에 붙었다. 그게 코우키의 최선이다. 결국 행복히 걸어 다니던 광장의 연인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이들도,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이 모든 건 추억과 보답을 위한 시간이다. 쿠로사와가 내내 한결같은 동안에, 혹은 코우키가 내내 동참하는 동안에. 코우키는 쿠로사와의 팔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풍선이 가드레일을 두들기는 소리가 한참을 울리다 멎었다.

 여전히 아키모토는 이해할 수 없는 청춘 곁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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